My Early Life (Sard Al That)

170 나 자신의 이야기 (전반부) 동상을 제외하고는 다른 도로와 만나지 않았다. 우리는 차밭과 차 건조 공장, 포장 공장까지 걸었다. 셋째 날, 우리를 태운 차는 해안을 따라 서쪽으로 갔다가 내륙지역으로 이동했는데 그곳에서 벼가 자라는 논을 지나갔다. 벼꽃의 향기는 밥을 지을 때 밥물이 끓는 냄새와 비슷했다. 운전사는 매번 ‘라슈트’까지 얼마나 더 가야 하는지 물었는데, 들에서 일하는 농부들은 15파라상(65)남았어요, 10파라상 남았어요, 5 파라상만 더 가면 돼요 라고들 대답했다. 우리는 라슈트에 도착했다. 오렌지 나무들이 길가에 심어져 있었는데 우리가 갔을 당시 오렌지 열매들이 달려 있었다. 그곳에서 점심을 먹고 우리는 다시 북서쪽으로 이동하여 또 다른 카스피해 연안의 도시 ‘아스타라’로 갔다. 그 지역은 이란과 러시아의 국경지대였는데 고원에서 바다로 흐르는 물줄기가 두 나라를 가르고 있었다. 물줄기를 중심으로 양쪽에 확성기가 설치되어 있었다. 러시아 측에서는 이란의 샤 정권을 비방했고 이란 측에서는 소비에트 정권을 비방했다. 우리는 다시 람사르로 돌아왔다. 넷째 날, 우리는 여행에서 이용했던 차를 타고 ‘카라즈’ 를 경유해 다시 테헤란으로 돌아왔다. 1959년 8월 말, 우리는 이란 비행기를 타고 샤르자로 돌아왔다. 그 비행기는 이란 정부가 셰이크 아흐마드 빈 라시드 알무알라를 테헤란으로 초청한 후 그를 태워오려고 보낸 것이었다. 이전에도 많은 걸프 연안의 셰이크들이 테헤란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셰이크 아흐마드 빈 라시드 알무알라는 병이 나서 그 비행기에 타지 못했다. 테헤란에 이스라엘 사무소 개소 1959년 9월 초, 이란 정부는 테헤란에 이스라엘 사무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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