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Early Life (Sard Al That)

200 나 자신의 이야기 (전반부) 담은 연설들이 발표되었다. 행사가 끝난 뒤 학생들은 줄맞추어 학교 밖으로 나가 동네와 알와딴 영화관 사이의 길에서 행진했다. 학생들이 영화관 앞 광장에 도달했을 때 소수의 이란인들이 알 수 없는 이유로 학생들에게 공격을 가했다. 학생 한 명이 사망하고 많은 이들이 부상을 입었다. 그 다음날인 1963년 4월 24일 저녁, 나는 공업학교에서 나와 어제 사건에 대해 알아보러 두바이로 가는 길에 밧띠 빈 비슈르를 만났다. 그는 그날 아침에 있었던 일을 내게 얘기해주었다. “두바이 경찰국 앞에 군중들이 잔뜩 모였고 시위대와 피의 복수를 요구하는 사람들의 위협적인 발언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살해 용의자를 확보하고 있는 두바이 경찰국의 영국인 장교에게도 압박을 가했습니다. 직접 용의자를 처단할 테니 그를 인도하라는 것이었지요. 시위대의 분노는 그 자리에 있던 두바이의 사업가 사이프 빈 아흐마드 알구라이르가 개입하고 나서야 누그러졌습니다. 이 사업가는 분노한 시위대를 설득했고, 시위대는 그의 조언을 귀담아들었습니다.” 또 밧띠가 말했다. “사이프 빈 아흐마드 알구라이르는 그날 아침 희생자의 장례 예배와 매장 의식에 참석했고 매장이 끝난 뒤 두 손을 들어 큰소리로 희생자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우리가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다른 시위대 무리가 지나갔다. 나와 밧띠 빈 비슈르도 시위에 참여하여 두바이 경찰국을 향해 갔다. 경찰국에 도달하기 전에 두바이 경찰관들이 시위대를 저지했다. 그때 두바이의 사업가인 싸니 빈 압둘라 아부 까풀이 개입하여 설득했지만 시위대는 경찰과 몸싸움을 벌였고 결국 경찰은 진압봉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계속해서 구호를 외치는 작은 무리를 제외한 시위대는 해산되었다. 나와 밧띠 빈 비슈르는 바로 그 작은 무리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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