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나 자신의 이야기 (전반부) 지은 알이슬라흐 알까시미야 학교의 1949-50 학년도가 시작됐다. 대다수 학생들과 모든 교사들이 등교했지만 무함마드 빈 알리 알마흐무드 교장 선생은 오지 않았다. 그는 카타르로 전근했다. 알이슬라흐 알까시미야 학교의 후임 교장은 무바라크 빈 사이프 알나키 선생이었다. 나는 2학년이 되었다. 그 해에는 학교에 나이 많은 학생들이 없게 되었다. 그들이 공부를 마친 것이었다. 1950년 6월, 알이슬라흐 알까시미야 학교의 수업이 끝나고 방학에 들어갔다. 셰이크 술탄 빈 사끄르 알까시미가 마지막 수술까지 완료하고 귀국할 날짜를 논의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귀국 시기는 헤지라력 1369년 라마단 달이 지난 후, 즉 서력 1950 년 7월 이후였다. 아버지는 살림 빈 술탄 빈 살림 알까시미의 농장과 그에 딸린 집, 그리고 부대시설을 샀다. 농장은 라스 알카이마의 ‘알굽브’ 마을에 있었다. 1948년 라스 알카이마에 정변이 일어났을 때 살림 빈 술탄 알까시미는 자신의 아버지를 대리하여 통치하고 있었다. 정변이 일어나자 그는 보트를 타고 라스 알카이마에서 샤르자로 도주하여 이후 샤르자에 거주했다. 1950년 여름이 되어 나의 아버지는 여름을 보내기 위해 우리를 라스 알카이마로 데려갔다. 거기서 우리와 함께 며칠을 머문 후 혼자 샤르자로 돌아갔다. 아버지는 당시 큰아버지를 대리하여 샤르자를 통치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인도에서 귀국할 큰아버지를 맞이할 준비를 했지만 결국 큰아버지는 생전에 귀국하지 못했다. 우리는 라스 알카이마에서 여름을 보낸 후 샤르자로 돌아왔다. 와서 보니 대추야자나무 잎으로 지어진 알이슬라흐 알까시미야 학교가 돌과 산호, 그리고 석고 건물로 대체되었다. 이 건물은 ‘ 이스마일 알부라이미의 집’이라 불렸었다. 이스마일 알부라이미는 샤르자에서 유명한 전통약재 상인이자 출생등록 담당자였다. 그는 아이가 태어난 집에서 약재와 기타 치료 물질을 사러 오면 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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